리튬의 그림자에서 벗어나려는 나트륨의 여정
"나트륨이온 배터리? 그게 되겠어?" 10년 전만 해도 대부분의 배터리 전문가들이 고개를 젓던 기술이다. 나트륨이온(Na⁺)은 리튬이온(Li⁺)보다 덩치가 67%나 크고(이온 반지름: Na⁺ 1.02Å vs Li⁺ 0.76Å), 무게도 3배나 무겁다. 에너지밀도로만 따지면 리튬이온 배터리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2020년대 들어 상황이 급반전됐다. 리튬 가격이 폭등하고(2021년 톤당 1만 달러 → 2022년 8만 달러), 공급망 불안정이 심각해지면서 '차선책'이던 나트륨이온 배터리가 갑자기 '필수 대안'으로 떠올랐다. 나트륨은 바닷물에서 무한정 얻을 수 있고, 가격도 리튬의 1/40 수준이다. CATL이 2021년 첫 상용 나트륨이온 배터리를 발표하면서 전 세계가 주목하기 시작했다.
문제는 나트륨이온의 큰 덩치였다. 리튬이온 배터리에서 잘 쓰이던 양극재 구조에 나트륨이온을 억지로 밀어넣으면 구조가 붕괴된다. 마치 소형차 주차장에 트럭을 주차하려는 것과 같다. 층상 구조 양극재에서는 충방전 과정에서 나트륨이온이 들락날락하면서 층간 간격이 변하는데, 이때 구조적 스트레스가 누적되어 결국 붕괴에 이른다.
특히 NaxMO2(M = 전이금속) 층상 구조에서는 나트륨 함량이 변할 때마다 상전이가 일어난다. x=1에서 x=0.7으로, 다시 x=0.3으로 변하면서 P2상, P3상, O3상 등 여러 상들 사이를 오간다. 각 상전이마다 부피 변화가 수반되고, 이는 입자 균열과 전기적 접촉 손실로 이어진다. 100사이클 후 용량이 절반으로 떨어지는 일도 흔했다.
작은 이방인들의 큰 역할: 도펀트가 만드는 기적
해답은 의외의 곳에서 왔다. 구조를 완전히 바꾸는 대신, 아주 조금의 '이방인'을 초대하는 것이었다. 도핑(doping)이라 불리는 이 기법은 원래 전이금속 자리의 1-5%만을 다른 원소로 치환하는 방법이다.
2018년, 중국과학원 연구진은 Na0.67Ni0.33Mn0.67O2에 마그네슘(Mg)을 2% 도핑했더니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고 보고했다. 원래 100사이클 후 60%까지 떨어지던 용량 유지율이 85%로 뛰어올랐다. 더 놀라운 건 1000사이클 후에도 70% 이상을 유지했다는 점이다.
마그네슘의 비밀은 그 작은 크기(Mg²⁺: 0.72Å)와 강한 결합력에 있었다. 마그네슘은 니켈이나 망간보다 산소와 더 강하게 결합해서 층상 구조의 '기둥' 역할을 한다. 나트륨이온이 들락날락해도 층간 간격이 크게 변하지 않도록 버텨주는 것이다. 마치 건물의 보강재 같은 역할이다.
하지만 마그네슘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강한 결합력 때문에 전기화학 반응에 거의 참여하지 않아서, 도핑량이 많아질수록 용량이 떨어졌다. 2%가 최적점이었는데, 이보다 많으면 용량 손실이, 적으면 안정화 효과가 부족했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듀얼 도핑' 전략이다. 구조 안정화용 원소(Mg, Al, Ti)와 전기화학 활성 원소(Fe, Cu, Zn)를 동시에 넣는 것이다. Na0.67Ni0.28Mn0.67Mg0.03Ti0.02O2 같은 복잡한 조성이 나오는 이유다. 각 원소가 서로 다른 역할을 하면서 시너지를 만든다.
화학의 체스게임: 원소들의 치밀한 배치 전략
도핑은 단순히 원소 몇 개를 바꾸는 게 아니다. 각 원소의 크기, 전하, 선호하는 결합 환경을 모두 고려한 정교한 '화학 체스게임'이다. 잘못 두면 오히려 구조가 더 불안정해질 수 있다.
알루미늄(Al³⁺) 도핑의 경우를 보자. 알루미늄은 작고(0.54Å) 전하가 높아서 산소와 매우 강하게 결합한다. 1% 정도만 넣어도 층간 구조를 크게 안정화시킨다. 하지만 3% 이상 넣으면 용량이 급격히 떨어진다. 알루미늄이 전기화학적으로 비활성이기 때문이다.
반면 철(Fe³⁺) 도핑은 다른 패턴을 보인다. 철은 전기화학 반응에 적극 참여해서 용량 향상에 기여한다. 하지만 구조 안정화 효과는 상대적으로 약하다. Fe³⁺/Fe⁴⁺ 산화환원이 일어나면서 이온 크기가 변하기 때문에 오히려 구조적 스트레스를 가할 수 있다.
가장 정교한 전략은 '그라디언트 도핑'이다. 입자 중심부에는 구조 안정화 원소(Mg, Al)를 많이 넣고, 표면부로 갈수록 전기화학 활성 원소(Fe, Mn)의 비율을 높이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입자 내부는 안정하게 유지하면서 표면에서는 활발한 전기화학 반응을 일으킬 수 있다.
실제로 연세대 연구진은 2022년 이런 그라디언트 구조를 가진 Na0.67Ni0.33-xMn0.67MgxO2 (x=0→0.05)를 보고했다. 중심부터 표면까지 마그네슘 농도가 점진적으로 변하는 구조에서 2000사이클 후에도 80% 이상의 용량을 유지했다. 하지만 제조 공정이 복잡하고 비용이 높다는 단점이 있다.
미시 세계의 건축 공학: 격자 변형과 결함 제어
도핑의 효과를 이해하려면 원자 스케일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들여다봐야 한다. X선 회절(XRD) 분석을 보면, 도핑 전후로 격자 상수가 미묘하게 변한다. Mg 도핑의 경우 c축(층간 간격)이 0.02-0.05Å 정도 줄어든다. 작은 변화 같지만, 이는 나트륨이온의 이동에 큰 영향을 미친다.
더 흥미로운 건 국소 구조의 변화다. Extended X-ray Absorption Fine Structure (EXAFS) 분석을 해보면, 도펀트 주변의 원자 배치가 완전히 달라진다는 걸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Ti⁴⁺가 들어가면 주변 6개 산소 원자와의 결합 거리가 모두 짧아진다. 이는 주변 전이금속들의 전자 구조에도 영향을 미쳐 전체적인 안정성을 높인다.
중성자 산란 실험으로는 더 놀라운 사실이 밝혀졌다. 도핑된 양극재에서는 나트륨 이온의 확산 경로가 바뀐다. 순수한 NaMO2에서는 나트륨이 직선적으로 이동하는데, 도핑하면 구불구불한 경로를 택한다. 언뜻 비효율적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에너지 장벽이 더 낮아져서 이동이 쉬워진다.
이런 미시적 변화들이 거시적 성능에 미치는 영향은 전기화학 임피던스 분광법(EIS)으로 확인할 수 있다. 도핑된 샘플에서는 전하 전달 저항이 확연히 줄어든다. 특히 저온에서 그 차이가 두드러지는데, 0°C에서 순수 샘플 대비 저항이 1/3까지 감소하기도 한다.
실용화의 현실: 비용과 성능 사이의 줄타기
실험실에서 아무리 좋은 결과가 나와도, 실제 양산에서는 완전히 다른 도전이 기다린다. 가장 큰 문제는 도핑 원소의 균일한 분산이다. 실험실에서는 몇 그램 단위로 완벽하게 제어할 수 있지만, 톤 단위 생산에서는 얘기가 다르다.
CATL의 나트륨이온 배터리 양산 라인에서도 초기에 이 문제로 고생했다고 알려져 있다. 같은 배치에서 나온 양극재임에도 불구하고 도핑 농도 편차가 10-20%씩 발생했다. 이는 배터리 셀 간 성능 편차로 이어져 팩 레벨에서 심각한 문제를 일으켰다.
해결책은 의외로 단순했다. 도핑 원소를 미리 코팅된 전구체를 사용하는 것이다. 기존처럼 모든 원료를 한꺼번에 섞는 대신, 주원료에 도핑 원소를 미리 코팅해서 균일성을 확보하는 방식이다. 비용은 10-15% 증가하지만, 품질 편차를 1/10로 줄일 수 있다.
경제성 측면에서는 도핑 원소의 선택이 중요하다. 마그네슘은 저렴하지만(kg당 2-3달러) 효과가 제한적이다. 반면 코발트는 효과는 뛰어나지만 가격이 비싸고(kg당 50-70달러) 공급망 이슈가 있다. 최근에는 망간, 철, 알루미늄 조합이 최적의 성능/비용 균형점으로 여겨진다.
시장 반응도 흥미롭다. 초기에는 에너지밀도가 낮다는 이유로 회의적이었던 전기차 업계가 최근 태도를 바꾸고 있다. BYD는 2023년부터 일부 모델에 나트륨이온 배터리를 적용하기 시작했고, 테슬라도 관심을 보이고 있다. 단순히 저가 시장용이 아니라, 특정 용도(저온 성능, 안전성 중시)에서는 리튬이온보다 우수할 수 있다는 인식이 퍼지고 있다.
2025년 현재 나트륨이온 배터리 시장은 연평균 30% 성장하고 있으며, 2030년에는 50억 달러 규모에 달할 것으로 예측된다. 도핑 기술의 발전이 이런 급성장의 핵심 동력 중 하나다. 결국 '리튬의 그림자'에서 벗어나려던 나트륨이 독자적인 영역을 개척해가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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